1부 아파트문화 50년, 뒷 이야기
원조 아파트
국가 경제가 발전하면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필연적으로 주택문제가 발생한다.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농촌인구가 대거 몰려들기에 주택난이 심각해 지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파트'이다. 해방 이후 1958년 (주)중앙산업이 해외에서 주택건설 기술자들을 초빙해 종암동 고려대학교 옆에 5층짜리 '종암아파트' 지은 것이 원조이다. 하지만 분양은 순조롭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괴상한 아파트가 전통방식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분양이 안 되자 임대로 전환했는데, 하숙집 주인들이 세를 얻어 지방출신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기도 했다.
서울의 명물
61년에 들어선 군사혁명 정부는 도심지에 인구가 집중하여 주거공간이 협소해짐에 따라 열악해진 주거환경을 개선하고자 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중에 도시의 밑그림을 바꾸고 도시생활을 간소화 할 수 있는 아파트를 추진하였다. 이에 중앙난방 방식에 수세식화장실과 엘리베이터를 갖춘 단지화된 10층짜리 아파트 건설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부정적인 여론(국민소득 고작 1백불, 전기사정도 좋지 않음, 기름도 나지 않는 나라에 기름난방이 무슨 사치냐 등)에 밀려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가구별 연탄난방으로 바뀌어 지어졌다. 61년 착공해 이듬해 12월에 1차 6개동 완공하고 64년 2차분 4개 동이 완공되어 드디어 '마포아파트'가 완성되었다. 서구적인 생활에 익숙한 해외유학 출신 대학교수, 연예인, 공직자, 외국인 선교사들이 잇따라 입주하면서 아파트는 어느새 중.상류층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이후 처음으로 프리미엄이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아파트문화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천덕꾸러기 시민아파트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개통된 65년, 변두리 지역이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해 기반시설이 잘 갖춰진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초기의 서민을 위한 아파트가 비싸지면서 아파트의 매력이 떨어지는 듯 했다.이 무렵 지방 대도시에서 무주택 공무원을 위한 소형아파트가 건설되었고 주택공사가 서을 한남동에 11층짜리 외국인전용 힐탑아파트를 건설해 고층아파트 시대를 열었다.
무작정 상경, 와우아파트 붕괴
'불도저' 김현옥 부산시장이 서울시장으로 스카웃되면서 서울은 빠르게 변해갔다. 먼저 서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는데,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에 윤중제(둘레뚝)을 쌓아올리며 한강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서울 주택의 3분의 1인 산비탈마다 빼곡히 들어선 무허가 판잣집을 도시미관상을 위해 정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서민복지의 일환으로 시영아파트를 짓기로 했으나 재정이넉넉하지 않은 탓에 실적이 저조했다. 그러다 판잣집 철거민을 수용하고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해 시민아파트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서민의 도시생활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듯 했다. 69년 이른 봄,착공해 1년도 안돼 많은 시민아파트를 뚝딱 지어져 그 해 초여름 금화아파트가 부분적으로 완공되어 첫 입주를 하였다. 시민아파트는 11평으로 연탄난방이고 작은 방2, 마루,부엌 등 아파트의 기본 형태는 갖추었으나 화장실은 여러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해 불편했다. 골조공사만 끝낸 시민아파트는 입주하기 위해서 직접 온돌,내벽,전기등 내부시설공사를 해야만 했다. 가구당 15만원 정도 들었는데 생활이 어려운 철거민은 그림의 떡이라 전매가 금지된 입주권을 5~10만원에 팔고 또다시 판잣촌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시민아파트는 37개 지구에서 1만 8천 가구가 건설되어 서울의 모습을 확 바꿔 놓았다. 그러나 빠른시간 내에 많이 지어진 시민아파트는 처음부터 무리가 따랐다. 서울시의 회유로 억지로 떠맡은 건설업체들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철근과 시멘트 등 건축자재를 기준량보다 적게 사용해 입주 한달이 안된 와우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착수한지 1년 2개월 만에 일어난 참사였다. 많은 업적을 남긴 김현옥서울시장이 이 사건으로 책임지고 경질되었다.
말죽거리 토지투자 열풍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개통되면서 강남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자 말죽거리 일대가 신흥 개발지역으로 떠올랐다. 말죽거리는 지금의 양재동 부근을 가리키며 옛 지명으로 한양에서 남쪽으로 가는 첫 길목이었다. 이곳은 역원이 있어 여장을 풀고 쉬어 가거나 말죽을 쑤어 먹었던 주막거리 였다. 63년 서울시에 편입되었지만 서울 같지 않은곳 서울 특별시가 아니라 서울'보통시'였다. 이 남촌은 도시 변두리 농촌으로 농사를 짓고 살고 전기사정은 비교적 괜찮아 호롱불 신세는 면했으나 상수도 보급이 안되 우물을 사용, 비포장 도로에 흙먼지가 날리고 비오면 진흙탕이 되었다. 교통은 한남나루터의 나룻배를 이용하거나 몇대 안되는 시영버스가 고작인 소외지역이었다. '깡촌' 말죽거리는 경부고속도로 착공된 68년, 개발바람이 일었다. 영동지구(역삼동, 논현동,서초동 등)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면서 활기를 뛰기 시작했고 이때 한강 이남을 제 2의 서울로 개발, 강북인구 100만명을 이주시켜 강북에 집중된 불균형한 도시구도를 분산시킬 계획을 발표하였다.
졸부, 황금의 땅 말죽거리 토지투자 열풍
땅 투기가 절정을 이룬 것은 경부고속도로가 추진되던 무렵이다. 땅값은 대체로 개발계획발표, 착공,완공 이렇게 세차례 뛰게 된다. 그런데 월남특수로 시중에 돈이 넘쳤던 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구체화되자 예정지 주변으로 시중 투기성자금이 몰리면서 돈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땅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이들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다'은 확고한 믿으으로 인터체인지와 멀리 떨어져 쓸모없는 주변지역까지 무차별로 사들였다. 도로를 따라 도시 자본이 뒤따르기 때문에 아무리 쓸모없는 산간지역이라도 일단 도로가 뚫리면 땅값이 오르므로 졸지에 부자가 된 '졸부'가 생겼났다. 당시 토지투자 광란은 68년 부동산투기억지세(토지 양도차익 50%)를 신설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한동안 잠잠했던 토지시장에 제3한강교 개통, '좌영동.우 잠실'의 강남이남 개발계획등대형 호재가 겹치면서 분위기가 들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듯 돈 냄새를 맡고 투기꾼, 일반 투자자, 복부인들이 모여들어 땅투기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매도자가 부르는 값이 시세가 되고 등기열람과 현장답사도 않고 매매가 이루어 졌다. 이렇게 전매되는 과정에서 투기꾼들은 미등기전매로 불로소득을 챙겼다.
신선한 땅을 찾아서
주말농장이 처음 생긴 것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던 69년이었다. 부동산 투자대상이 택지에서 임야로 바뀔 때 쯤 풋풋한 흙내음이 그리운 중상층들은 도로망이 어느정도 갖춰지고 교통수단이 좋아진 서울근교 임야를 매입해 주말농장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때쯤 전원주택단지도 조성되었다. 대표적인 단지로는 경기도 용인의 기흥단지, 안성의 대림동산, 서욱 북악산 기슭의 평창동 주택단지이다.
초가집 추방운동, 서울은 만원이다
70년 7월, 착공한지 2년 5개월 만에 경부고속도로가 시원스레 뚫렸다. 도시간의 거리와 시간을 단축시켜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어 놓은 명실공히 경제동맥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자 도시 자본이 농촌을 파고 들어 빠른 속도로 도시화 되어 갔다.마을길을 넓히고 초가지붕을 스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는 등 많은 협동사업을 추진하며 가난의 상징인 초가집을 짓지 못하게 하는 '초가집 추방운동'도 이어갔다. 서울시 면적은 전체의 0.6%에 불과하지만 인구가 500만명늘 넘어서며 세계10대 도시가 되었으나 정상적인 도시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남산1호 터널이 뚫리고 강남지역 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하며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70년 11월, 영동신시가지 개발에 착수했다. 영동지역을 부도심으로 개발하여 인구 60만 명을 수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71년 7월,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도시민의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서울외곽으로 그린벨트로 지정하였다. 76년 12월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전국 14개 지역, 전국토지의 5.5%를 그린벨트로 지정했다.
아파트, 황금알을 낳다
1970년대, 국민소득은 2백 불 정도였지만 월남특수로 인해 해방 이후 처음으로 풍요로움을 누렸다. 생활과 의식도 서구화되어 가면서 주택에 대한 취향도 변해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해마다 증가했다. 한강맨션아파트 분양은 차츰 대형화, 고급화 되어가는 아파트 문화를 확산시켰다
황금알은 가수요를 낳는다
69년 10월, 중앙공급식 온수난방 시설을 갖춘 5층짜리 한강맨션아파트를 한강변 동부이촌동에 건설했다. 최초로 견본주택을 만들고 공사가 끝난 1층에 평형별로 내부를 꾸며 일반에 공개했다. 평형은 27~55평형으로 700 가구를 분양하여 대형아파트 시대를 열었다. 분양당시 어려움이 있었지만 입주후 편리한 생활이 알려지자 넓은 단독주택에 살던 사람들이 먼저 움직였다. 아파트 관리비가 부담스럽긴해도 가정부없이 살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프리미엄이 붙기 시작하고 전세시장도 형성되었다. 전세값은 집값의 50%선을 유지하였다. 이 시점을 시작으로 끝없는 토끼(집값)와 거북이(전세겂)의 경주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한강민영아파트를 선착순 분양했는데 분양 전날 몰려 들어 밤을 지새우는 소동을 벌여 공개추첨으로 변경하였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실추되었던 아파트의 이미지가 다시 좋아지며 '붐'이 일자 주택공사는 단독주택 건설을 중단하고 아파트 건설에 주력하게 된다.
도둑촌 파동
한강 한목판에 지리잡은 여의도에 최신기술을 총동원하여 13층짜리 시범아파트를 건설하였다. 서울도심과 김포공항,인천, 수원 등을 연결하는 개발축 선상에 위치한 여의도에 국회와 서울시청을 옮겨 수중도시로 건설하고자 했다. 재원 마련을 위해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개발을 촉진시켜 꿩 먹고 알 먹자는 속셈이었다. 15~40평형을 평당 14만원에 모집했는데 성공리에 끝났다. 맨션의 인기가 높아지자 민간 주택업체도 서둘러 건설에 나섰으나 비싼 분양가와 엉터리로 지어 팔고 도망가는 등 수요자들이 믿지 못해 분양이 쉽지 않았다. 이때 도둑촌'파동으로 사회가 술렁거리며 예상치 못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71년, 당시 부자 대표동네인 동빙고동 일대는 부유층이 모여 사는 곳으로 수영장 있는 집값이 3천만원이 넘는 궁궐같은 호화 주택에 밀집되어 있어 '도둑촌'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때는 서울시내 곳곳이 판잣집이 즐비한 시절이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해 바로 옆 이촌동 대형 맨션아파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덕분에 민간 주택업체들이 지은 맨션아파트가 불티나게 팔렸다. '도둑촌'파동으로 고급아파트 수요가 크게 늘어났으며 이는 아파트 공급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파트 문화 만들기
교통이 편리하고 생활기반 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는 등 주거환경이 좋기 때문에 아파트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대부분 정원이 딸린 정원을 원했지만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아파트로 주거이동을 하여 새로운 도시문화로 정착하게 되었다. 주거문화의 무게 중심도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기울어져 갔는데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생활혁명
생활혁명은 60년대 이후 국산제품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냉장고, 흑백TV와 세탁기등 주부의 일손을 덜어주는 제품이 출시될때 맨션아파트는 일종의 완결판이었다. 주택구조가 방은 침실로, 응접실은 거실로, 재래식 부엌은 입식주방으로, 창고가 다용도실로 바뀌면서 용도 위주로 재편성 되었다. 거실에서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전통적인 안방문화가 거실문화로 바뀌었다. 거실이 주거문화의 중심이 된 것이다. 주방 일을 한결 편안하게 해 주었고 단독주택에서 필요했던 가정부가 사라지고 파출부가 등장하는 계가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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